하나님이 보호하사 대한민국 만세

21년12월18일 류태영박사 이야기

히요근 2021. 12. 18. 00:42

 

 

류태영박사님 성공 이야기 2021-10-14 (퍼옴 예수 생명 사랑의종)

덴마크 부흥의 아버지 그룬트비 목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덴마크 유학생 류태영 박사가 이룬 새마을 운동의 역사 감동입니다.

웅장한 그룬트비(Nikolar Frederik Severin Grundtvig) 교회가 서 있습니다. 그룬트비 하면 덴마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부유한 덴마크가 있기까지 그룬트비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도 그룬트비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룬트비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178398일 덴마크의 우드 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라고 말하고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 부흥 운동을 벌여 오늘의 선진 낙농 국의 덴마크 기초를 이룬 사람입니다.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의(지금의 독일) 전쟁에서 패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며 곡창지대인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주어야만 했습니다.

남겨진 땅은 북해와 발트해의 찬 바람을 맞는 황무지 땅 스칸디나비아였습니다.

국가 경제는 파산지경이었고, 중앙은행도 망할 상황이었으며,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룬트비는 '국민의식구조개혁' 외치며 스킨디나비아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낙농업을 주장했고, 역사상 최초의 성인기술교육학교 설립을 주장하여 생긴 것이 국민 고등학교였습니다.

국민 고등학교에서는 적극적인 개척정신을 가르쳤고, 특히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3 애 정신을 강조하여 국민의식을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무장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땅을 사랑하자는 덴마크 정신의 구호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국민성 개혁, 낙농기술 등의 덴마크 중흥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덴마크 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신학이 지나친 합리주의 경향으로 치우쳐 신앙을 철학사상의 일종으로 취급한다.'라는 비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교회는 루터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사직도 그만두게 되었고, 7년간 설교도 금지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 국회의원이 되었고 국방의 의무와 신앙,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주창하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외 찬송 시를 많이 지어 덴마크 교회용 찬송가의 60% 이상이 그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목회자이자 시인이며 교육가, 정치인이었던 그는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덴마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룬트비와 함께 꼭 기억해야 할 우리나라 최초의 덴마크 유학생인 류태영 박사님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968년 덴마크 유학 시절 교회 부장관을 만나 대담하는 류태영(건대 블로그 사진)

덴마크 정신을 배워 새마을 운동으로 한국의 농촌을 부흥시킨 류태영 박사님

류태영은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 아버지를 따라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18살에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새 역사를 위하여>란 책을 읽고 덴마크의 황폐했던 농촌이 세계적인 복지국가로 탈바꿈한 기록을 읽은 후 무작정 덴마크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청년이 유학비가 어디 있었기나 했을까요?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썼다.

' 내가 오직 바라는 건 한국 농촌이 잘 사는 것입니다. 당신네 나라처럼 훌륭한 나라에서 배워 우리 농촌을 잘 살게 하는데 내 인생을 바치겠으니 생활비와 전액 장학금을 좀 줄 수 없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답장이 왔을까요?!

당시는 대사관도 없어서 백과사전을 뒤져 왕궁 주소로 보냈고 40일 후 답장이 왔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멋진 나라 덴마크입니다.

그래서 고작 80달러를 가지고 덴마크 유학길에 오릅니다.

덴마크에 가서 다른 나라들의 농촌개발 사례들과 그 이론적 배경에 집중하여 연구했지만, 덴마크와 우리나라와의 격차가 너무 커서 바로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된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6개월 동안 이스라엘에서 농촌개발을 연구하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건국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농촌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고 2002년에 <농촌 청소년 미래재단>을 설립하여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사업과 청소년 건전육성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훌륭한 두 분이십니다. 한 사람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훌륭한 지도자가 나라를 일으킨 것과는 달리, 덴마크는 서서히 그룬트비의 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주일마다 한인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한 번쯤은 우리 숙소 옆에 있는 그룬트비 교회에서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없는 S가 어느 주일날 '구경' 다녀오더니만 놀랄만한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하시며 예배를 드리는가 했더니 예배가 끝나자마자, 가운을 탁 벗어 던지더니 교인들과 빙 둘러앉아 맥주잔을 돌리며 술을 마셨다'라며 믿음 없는 그도 놀란 듯이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교회는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난 UCC 대학교수들도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냥 문화적으로 한 달에 한 두 번 나들이 가듯 간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습니다.

실제로 덴마크의 '문화 밤'이라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축제일에 돌아다니며 보았는데

교회마다 이상야릇한 공연을 하고 있었고, 머리 허연 노인들만 몇몇씩 앉아있었습니다.

그룬트비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어찌 될 수 알 수 없는 이 시국에 앞으로의 변화가 염려됩니다.

https://youtu.be/Rv0GvTL3XBg